2008년 05월 16일
한국 기독교의 역사
한국 기독교의 역사
1627. 네덜란드 벨트브레(Jan T. Weltvree) 일본으로 교역차향해중 제주 앞바다에 표류
1653. 하멜(Hendrik Hamel) 일본으로가던중 제주에표류 36명 제주감영에 압송
1816. 맥스윌과 홀 군함을 이끌고 군산부근(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진 갈곳)정박, 조대복에게 영문성경을 전함.
1832. 7. 귀츨라프(네덜란드선교회), 충청도 고대에서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함.
1874.10. 로스선교사 첫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상인 백홍준 부친에게 한문신약전서를 전함
1866. 9. 2 토마스선교사 대동강에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 순교함
1880. 백홍준, 기독교서적 휴대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882.10. 6 서상륜, 영국성서공회의 한국최초의 권서로 한국으로 파송받음
1883.10. 로스선교사 요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출간
1884. 9.20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1884.11. 로스, 윕스터와 서간도 한인촌을 방문 12월 한국인 75명에게 세례를 줌
1885. 1.21 스크랜톤(Dr.W.B.Scranton)선교사(의사) 한국을 향해 뉴욕을 출발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한국 인천에 입국함
1885. 4. 5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창립
1885. 4.10 알렌에의해 광혜원 설립(국립병원으로 설립,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함)
1885.10.11 알렌 선교사 집에서 외국인 12명이 한국 최초의 성찬식 거행
1886. 5.31 이화여학교 설립.(서울 정동에서 미감리회 여선교사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설립)
1886. 6. 8 배재학당 개교함
1886. 7. 노춘경, 국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음
1887. 1.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언더우드선교사에게 세례받음
1887. 9.27 새문안교회, 로스와 한국인 신자14명이 참석하여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
1888. 4.28 금교령 법령.(천주교에 전교를 금지한다는 법령)
1889. 토론토대학 YMCA파송한 게일, 독립선교사 팬윅(Malcom. C. Fenwick) 내한
1889. 10.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서 데이비스(j. h. dAVIES)목사 부부와 메리(Mary) 파송
1890. 4. 데이비스 전도하며 부산으로가던중 과로와 천연두, 폐렴으로 한국땅에서 순교
1895. 7. 3 한국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가 한국인에 의해 설립
1897. 5. 예수병원 설립.남장로회 한국 여선교사인 의사 잉골드에 의해서 설립 개원됨.
1897. 5. 2 고양읍교회 설립. 미국 남감리회 초대선교사 리드박사가 설립의 동기임.
1898. 9. 캐나다장로교회 그리어슨(R. G. Grierson), 푸트, 맥레선교사 파송
1900. 9. 9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약젼서> 출판기념예배 드림
1901. 5.14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김창식, 김기범)
1902. 6. 아펜젤러, 목포의 번역자회의 참석차 여행중 선박충돌사고로 순교함
1903.10.28 기독교청년회 창설(상류 지식층 지도자들과 청년 전도목적)
1906. 현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창립총회(대화회), 교단명을 대한기독교회로 정함
1907. 5.30 김상준 정빈 양씨가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다.
1907. 6. 감리교 협성신학교 개교
1907. 9.17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 선교사 33명모임 (한국최초의 목사 7명을 장립)
1908. 3. 1 한국인 목사 길선주 주례로 최초의 세례식 거행
1908.10. 8 구세군 한국본영 창설
1909. 7. 1 구세공보 창간. 처음에는 구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간되었다.
1910. 2.15 구세군사관학교 개교(한국에 개전된지 17개월만에 사관학교 개교)
1911. 3.13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 설립하다.
1911. 9. 대구 남문교회에서 열린 제5회 조선노회에서 7개노회 조직 결의
1911.12. 4 경기충청노회 성립.경성부 새문안교회에서 성립되었음.
1912. 2. 1 한국교회 주일학교 위원회 설립
1912. 9. 1 대한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
1914. 1.19 한국 최초의 유치원 이화유치원 개원
1915.12. 7 기독신보 발행. 일제치하 교회신문 1937년까지 속간됨.
1916. 9. 2 경북노회 분립. 제12회 경상노회에서 경북, 경남노회를 분립할 것을 허락받음.
1919. 2.26 한국기독교 연합공의회 조직
1919. 3. 1 삼일독립운동이 전국전국으로 전개됨
1919. 3. 1 금주동맹회 절제운동.1930년 YMCA를 중심으로 절제운동이 일어남.
1919. 4.15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발생
1922.11.20 기독교양재여숙 창립(경성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사회교육기관)
1922.11.25 기성 교단기관지 "활천" 창간호 발행
1923. 8.18 한국 YWCA연합회 결성
1924. 9.13 경기노회 충청노회와 분립
1925.10. 1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 남궁혁, 평양신학교 부임
1926.11.14 서울에서 토마스목사 순교 60주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설립
1926. 2.18 기독교연구회(한국YMCA) 창립(서울교회 중진들이 민족운동 목적)
1928. 7.24 청년 면려회 제3회 하계대회 및 정기총회(연세대학교)
1929. 2.27 성결교회 제1회 연회가 소집되고 교회법을 제정하다.
1931. 9.11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봉헌(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추진)
1931. 5.29 기독교증험론 발행(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발행함)
1931. 6.14 한국에서 최초의 여자목사 안수(기감 여선교사들)
1933. 1.20 기독교세계 창간(기독교감리회의 교회기관지)
1934. 6.14 한국감리교선교 선교50주년기념식(배재학교)
1935.12.22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창립(최태용목사 중심으로 한국인들에 의해 조직된 교단)
1936. 7.19 기독교보 발행(주간으로 1936.1.14 창간된 <종교시보>를 개제하여 발행함)
1937. 4. 1 그리스도교 한국선교회 설립(내한한 존 체이스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
1938. 2. 8 주기철목사 평양감옥에 구금됨
1938. 2.12 장로교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1938. 9.10 일제 총독부가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함
1938.10. YMCA, YWCA를 해산시키고 일본기독교청년회에 종속시킴
1938. 8.16 기독신문 발행(1942년 4월 23일까지 발행된 개신교 각교파의 연합신문)
1939.11.15 기독교문답 발행(이동욱지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발행)
1941.12.31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연합회 창립
1942. 4.29 기독교신문발행(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합동기관지)
1943. 9. 일제 주일밤예배, 삼일기도회 금지령
1944. 4.21 주기철목사 순교
. 한국 개신교의 분열
(1) 장로교의 분열
로마가톨릭 → 칼빈파 → 장로교
한국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교 (1953) 합동예수교장로교
→ (1951) 총회파(예장) (1959)
고려파장로교 통합예수교장로교
한국 장로교회는 1951년, 1953년 고려파와 기장파, 총회파라는 세 분파로 분열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총회파는 1950년대 말에 통합과 합동 두 교단으로 다시 분열하였다.
①고려파 장로교의 분열
1938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가결함으로써,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신사참배 요구에 공식적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이 때 신사 참배에 굴복하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여럿이 투옥 당했으며 그 중 50여명이 순교하였다. 해방 후 투옥 당했던 신사 참배 거부 운동 지도자들은 석방되어 ‘출옥성도’라고 불리면서 교회 재건 운동을 벌였다. 출옥성도들이 제시한 교회 재건 원칙 가운데 중요한 것은 신사 참배를 행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징의 문제이다. 즉 신사 참배 목사의 경우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신사 참배에 참여했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반대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 대립은 경남 노회에서 가장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경남의 출옥성도 한상동과 주남선은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으로 교육하는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박윤선을 주 강사로 초빙하고, 고려신학교가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학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만주 봉천에 체류 중인 박형룡을 교장으로 청빙하였다. 이에 대해서 경남노회는 1946년 7월 9일 임시노회를 열어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신학교 설립 기성회는 경남노회의 후원에 힘입어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경남노회원 가운데 교회 재건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려신학교에 대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46년 12월 3일 경남노회는 이들의 영향으로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노회를 탈퇴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1947년 3월 10일 경남노회는 재건운동 반대자들을 퇴출시키고, 교회재건원칙을 재삼확인하여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고려신학교의 교장인 박형룡이 한상동 목사와의 신학교 운영 방침에서 견해가 맞지 않아 1948년 4월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박형룡은 고려신학교를 전국적인 지지를 받는 총회신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한상동은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회와 독립장로교선교회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고, 고려신학교를 잠정적으로 총회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5월 제34회 총회에서 전남노회가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는 질문에 전 조선교단의 통리였던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법적인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는 다시 고려신학교의 승인을 취소하였고, 1951년 5월 21일 장로교 총회는 고려파 대표를 총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고려파는 따로 노회를 조직하여 ‘경남법통노회’라고 하고, 1952년 9월 고신측 제1총회를 진주 성남교회에서 개최하고 독립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전국에서 고신파를 지지하는 교회들이 나타나 1956년 6개 노회로 구성도니 총회를 구성하였다.
②기독교장로회 교단의 분열
장로교는 고려파가 분열한지 일 년 만에 또 분열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가진 사람들이 일제하에서 탄생시킨 조선신학교는 해방 이후 유일한 신학교였기 때문에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중을 얻었다. 보수주의 목사들이 많고 그 세력이 커서 어려움을 겪었다. 1947년 4월 대구 총회에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들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 이 학교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진정서의 주된 내용은 김재준, 송창근 교수등 의 자유주의 신학사상들에 대한 불만이다. 이들은 신, 구약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서의 오류를 주장하고, 정통교리를 비난했다.
총회는 보수 신학의 교수를 목적으로 1948년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총회 아래 두 개의 서로 다른 신학교의 통합 문제는 양파 사이에 큰 갈등을 일으켰다. 1951년 5월 25일 제36회 총회에서 양 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운 하나의 총회 직영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조선신학교에서는 다수자의 횡포이며 의결 절차가 불법이었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1952년 4월 29일에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제명 처분하고, 조선신학교 학생은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조선측 회원의 영향력이 강한 경기 노회가 1952년 5월에 열려 총회의 불법 결의를 부인한다는 성명을 냈으며, 같은 해 9월 대구에서 조신측을 지지하는 신도들이 호헌대회를 열었다.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제36, 37회 총회의 결의의 정당성을 재확인 하고, 김재준 목사 파면을 결의하였다.
이에 대하서 조신측은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에서 법통 38회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1954년 6월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명명하였다.
우리나라는 서양 여러 나라들에 비하여 개신교 내부 영역에서 세속화과정이 늦었다. 세속화된 성격의 개신교과 미국 등 서양 나라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한국에서는 보수적인 교회가 훨씬 우세하였다. 이 기장파의 분열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세속화의 방향으로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로 생겨난 사건이다.
③통합파와 합동파의 분열
고신파와 기장이 분열되어 나가고 남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1959년 또다시 분열하게 되었다. 예수교 장로회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진보적 성격의 지도자와 세계복음주의친교회(NAE)에 참여하는 보숙적 성격의지도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NAE측에서는 WCC가 자유주의적이고 용공적인 성격을 띤다는 이유를 들어 거기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했다.
보수적 집단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ICCC의 회장 맥킨타이어 목사가 방한했을 때 고신파 지도자들과 NAE측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환영함으로써 두 파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 왜냐하면 WCC측 사람들은 ICCC와 맥킨타이어 목사를 극단적으로 독선적인 보수파로서 분란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는 인물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WCC측과 NAE측의 대립을 심화시킨 또 하나의 사건은 당시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이 학교부지구입을 부정 지출하여 사기당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이에 WCC는 박형룡 교장의 인책 면직을 주장하였고, NAE측은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학교를 위하여 일하다 생긴 실수하고 주장했다. 1958년 제43회 총회에서 박형룡의 교장사림을 결정함으로써 마무리되었으나 두 파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 파송할 총회 대표 선출 문제로 경기 노회가 갈라짐으로써 교단분열로 나아가게 되었다. 1959년 5월에 열린 경기노회에서 뽑은 총대 선거에 부정이 있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같은 해 6월에 임시 노회를 열어 새로 총대를 선출하였다. 5월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NAE측이 많았고, 임시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WCC측이 많았다. 그리하여 두 개의 총대 명단이 1959년 9월 대전 총회에 동시에 제출되었는데 어느 쪽 총대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총회장 선출 등 교권의 방향이 결정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날의 회의에서 경기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나뉘어 회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총회는 11월 2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개하기로 하고 정회하자는 증경총회장들의 제안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회원들은 서울의 연동교회에서 전필순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다. 그 후 결합을 위하여 노력했지만 끝내 양측의 의견을 좁히지 못하여 1960년 총회부터는 완전히 서로 다른 교단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WCC측은 통합예수교장로회, NAE측은 합동예수교장로회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분열 하게 되었다.
④예장 합동측 분열
신념 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약간 진보적인 성격을 띠는 신복음주의 운동, 성서해석의 방법에 있어서 엄격한 전통방식을 벗어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합동진보측은 이러한 시도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었고, 합동보수측은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교단 운영과 신학교 운영을 둘러싼 의견 불일치와 대립이 심화되었다. 1979년 9월 대구총회에서 합동진보측이 합동보수측을 총회장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합동보수측은 대구 은일 교회당에서 자기들만의 또 다른 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예수교 장로회 합동 진보와 예수교 장로회 합동 보수로 또 다시 분열 되었다. 합동보수측은 분열 이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하나의 교단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시 몇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였다.
⑤기타장로교단의 분열
대한예수교성경장로교
대한신학교의 교장 김치선의 주도로 합동 측에서 1960년 9월 창립하였다. 1961년 총회를 개최하여 완전 분열하게 되었다. 미국의 성경장로회 선교회의 원조를 받으며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근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성서대로만 믿고 그대로 실행한다.
대한예수교호헌장로회
1962년 9월 제47회 합동 총회에서 분립하여 11월 19일 호헌총회를 창립하였다. 이들도 대한예수교성경장로교와 마찬가지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 가입하였다.
(2) 성결교의 분열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성공회(1534) → 감리교(1740) → 성결교(1901) →한국, 성결교(1907)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성결교회의 첫 번째 분열은 대구신학교 사건으로 발생했는데, 분리해 나간 그룹이 장로교로 흡수됨으로 말미암아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61년의 두 번째 분열은 더 심각하였다. 장로교의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과 마찬가지로 한국기독교연합회(KNCC)와 한국복음주의자협의회(NAE)의 가입과 탈퇴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합동하려고 서로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KNCC측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라고 칭하고 ICCC에 가입한 측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라고 칭한다.
1972년에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다시 내부의 신학 노선의 문제로 분열되어, 1973년에 예수교대한성결교회(혁신) 총회가 조직되었다.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교회는 존 웨슬리의 성결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결교단이다. 한국에 있어서 나사렛교회가 공식적으로 창립된 것은 1948년 이었다. 1954년 5월에 초대 선교사로 오은수 목사 부부가 내한, 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과 함께 본격적인 선교에 착수 하였다. 외국 선교 국장이었던 리펠트 박사가 1955년 5월 14일 내한 한 결과 11개 교회 대표들이 서울 영천교회에 모여 제1회 지방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3) 침례교의 분열
성공회(1534) → 침례교(1608) →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대전파)
→ 한국, 침례교 (1889) 기독교한국침례회(1976)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 (포항파)
침례교는 1959년 총회의 기존 지도자들과 선교부간의 마찰로 총회가 양분되었다. 1959년 3월 17일 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개최된 실행원회는 총회 장소 결정 문제로 총회 지도부와 선교부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두 곳에서 총회가 개최되었다.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1959년 4월 28일 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이란 이름으로 대전총회가 열렸으며, 기존의 교단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1959년 5월 25일 경북 포항 침례교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포항총회가 열렸다. 대전총회측은 선교부의 지원으로 원활히 교산산업을 수행하였지만, 포항총회측은 선교부의 지원이 없어 교단 발전과 침례교 정체성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에 성령과 은사 운동으로 교회가 영적, 재정적으로 윤택해지자 두 교회의 갈등과 반복이 점차 해소되었다. 결국 1968년 4월 16일 대전과 포항의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화해하고 단결하여 한국침례회연맹이라고 칭하였다. 1976년 11월 4일 한국침례회연맹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였다.
(4) 감리교의 분열
성공회(1534) → 감리교(1740) → 한국, 감리교(1884)
신학 방법론의 차이 또는 신앙 노선의 상위보다는 교회 정체나 교권의 쟁탈 문제로 분열한 것이 한국의 감리교회라고 하는데 흥미가 있다. 감리교는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되었다.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 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동대문교회에서 모임을 하고 감리교 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감리교는 재건 감리교회와 부흥 감리교회로 나뉘어졌다. 이 두 파는 서로가 자기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해서 서로 양보를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로 나온 합동안은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 것이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교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와서 이에 불만을 재건 감리교회는 문제를 제기하고 또 다시 갈라졌다. 그러나 양측 교회는 1949년 4월 20일 평신도 등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하나의 감리교회로 연합하고 5월에 통합총회를 열어 김유순을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감리교회는 그 후 1954년 류형기 감독이 재선되었을 때 이를 불법이라 단정하는 호헌파가 분립했으며, 1974년에 또 감독 선출 문제로 분열했다가 류형기 감독은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 하면서 양 교회의 합동을 호소하여 1978년 5월에 다시 하나가 되었다.
5. 맺음말
한국의 개신교의 종파 분열은 앞에서 설명한 것 이외에도 많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였다. 현재 60여개의 종파로 분리되어 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수많은 분열을 하였을까? 신학적인 노선의 차이, 교권 싸움 등의 원인으로 분열하였지만, 나는 이들의 분열을 이렇게 생각한다.
개신교의 조직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가톨릭은 교황이라는 정신적, 영성적 지도자가 있으며 교황이 모든 가톨릭의 전반사항을 책임지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톨릭은 중앙집권적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총회라는 것을 통해서 모든 교회의 전반사항을 관리하며, 이 총회의 의장은 투표로 선출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주의적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중앙집권적인 방법보다는 민주주의적인 방법이 더 옳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은 개신교와 같이 심한 분열은 생기지 않았다. 가톨릭은 단 하나인 교회로 존재하고 있다. 왜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보니, 중앙집권적인 방법으로 교회 내에 갈등이 생길 경우 그것을 권위를 가지고 중재해 줄 사람이 있지만, 민주주의적인 방법은 그것을 다수의 토론과 의견 교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 권위를 가지고 중재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 즉, 신학적인 노선, 교권 다툼에서 합의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서로의 주장과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니, 자꾸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들이 정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신앙을 가지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고, 서로를 미워하는 이런 것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르침인가?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말이다. 이 말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부분 검증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조금 고쳐 보고 싶다. 즉, 너를 알고 나를 알면 싸우지 않는다.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은 구태여 이길 싸움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 번 싸워 백 번 질 사람은 역시 구태여 싸우지 않는다. 사람들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싸움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할 때, 비로소 갈등과 대립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by | 2008/05/16 07:58 | 성경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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